책 [피로사회] 중 ‘피로사회’에서 한트케는 피로를 “세계를 신뢰하는 피로”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가 그 속에 새어 들어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들고 고독한 피로 속에서 완전히 파괴된 “이원성”을 복구한다고 한다.
한트케는 이런 “근본적인 피로” 위에다 활동성을 절대화하는 경향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져버린 모든 생존과 공존의 형식을 모아들인다. “근본적 피로”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탈진상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한다. 그것은 오히려 영감을 주거나 정신이 태어나게 하는 특별한 능력으로 묘사된다. “‘피로의 영감’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다는 무엇을 내버려두어도 괜찮은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라고 말하고 피로는 특별한 태평함, 태평한 무위의 능력을 부여하고 그것은 모든 감각이 지쳐 빠져있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피로 속에서 특별한 시각이 깨어난다고 한다.
이를 종합해봤을 때 한트케는 피로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피로를 계기로 잠시 자신을 돌아보고 여유 있게 지내며 재충전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요즘 학업, 업무, 집안일 등에 치여 살며 피로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쌓인 피로를 푸는 것을 계기로 잠시 혼잡한 사회에서 물러나 여행을 다니거나 여가 생활을 하는 등 재충전하고 있다. 이런 면만 봤을 때에는 한트케가 피로를 잘 정의했지만 나는 더 피로의 근원적인 측면을 생각해봤다.
우리 사회에서 피로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도, 학교나 학원에 가기위해 집을 나서는 학생들도, 과제를 내기 위해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대학생들도, 출근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는 직장인들도 모두 피로에 시달린다.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각자 자신의 방법으로 잠시 재충전을 한다. 그러고 나선 다시 사회로 돌아간다.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에서 피로는 불가피한 요소이다. 피로에 쌓인 사람들이 잠시 여가생활을 통해 재충전을 한 뒤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면 결국 또 피로에 물들게 된다. 이렇게 사람들은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살고 있다. 기계는 우리 사회, 톱니바퀴는 사회 속에 사는 사람들로 비유를 할 수 있다. 기계는 계속 작동하지만 톱니바퀴 하나가 굴러가지 않는다면 다른 톱니바퀴로 교체되고 굴러가지 않는 톱니바퀴는 낙오된다. 우리는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굴러간다. 기계가 작동할 때에는 쉼 없이 굴러가다 작동을 멈추면 잠시 쉰다. 하지만 얼마 안 있다 결국 다시 굴러가게 된다. 우리의 삶은 이와 같다. 대학생에 비유를 해보면 개강을 하고 학업을 위해 열심히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다가 시험이 끝나면 잠깐 재충전을 한 뒤에 다시 굴러가야 한다. 우리는 재충전의 시간이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결국 다시 굴러가야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따라서 한트케의 피로에 대한 정의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계속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도록 우리 삶을 미화시키고 환상을 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톱니바퀴처럼 ‘사회’라는 하나의 기계 속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굴러가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낙오되지 않기 위해.